적벽부란
- 황주에 유배된 소동파가 서기 1082년에 양세창과 함께 적벽에서 두차례 뱃 놀이를
하고 그 감회를 써 낸 것이 전,후 적벽부이다.
7월에 지은 것을 《전(前)적벽부》, 10월에 지은 것을 《후적벽부》라 한다.
호북에는 적벽이라 불리는 곳이 네 곳이 있다.
하나는 가어현의 동북쪽 양자강변에 있으며 이 곳이 삼국시대 주유가 조조를 대파한
적벽지전이 벌어젔든 곳이다.
또 하나는 무창현에 또 하나는 한양현에 마지막 하나는 황강현 성 밖에 있는데
이곳이 소동파가 뱃놀이를 했던 곳이다.
소 동파는 적벽대전을 했던 곳이 이 곳인 줄 잘못 알고 이 작품에 적벽대전의 고사를
인용 하였고 후에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인정하였다.
소 동파는 당쟁으로 혁신당에게 몰려 사형을 당할 뻔 했다가 황주로 유배되어 갔다.
이러한 역경 가운데서 그는 자연으로부터 안위 받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찾아가는
마음을 이 작품에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적벽부는 이른바 문부의 형식으로 소 동파의 거시적 인생관이 서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격조있게 나타나고 있다
‘부’란 운문(韻文)의 하나인 문체의 명칭인데, 사물의 서술을 중심으로 한
한대(漢代)의 장려한 작품에서부터 육조(六朝) ·당(唐)시대의 형식적인 소형 작품으로
쇠퇴한 ‘부’의 장르를 생동하는 묘사로, 서정과 사상을 겸비한 문장으로 부활,
완성시킨 작품이 이 《적벽부》이다. 삼국시대의 옛 싸움터 적벽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대비, 자연과 일체화하려는 소동파의 제물(齊物)의 철학이 결부되어,
유려(流麗)한 표현과 함께 문학으로서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후 적벽부를 읽으면 장자(莊子) 한 부를 읽은 것 보다
낫다고 하였다.
• 소 동파는 전 적벽부를 쓴 뒤 3개월 후에 다시 적벽에 놀러가 후 적벽부를 지었다.
전 적벽부는 실제의 풍경을 통한 서정을 쓴 것이고,
후 적벽부는 실제 없는 허경의 묘사를 중심으로 하였다.
** 중국 명(明)나라 때의 화가·서예가·학자인 문징명이 쓴 전,후 적벽부는
서예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초서체를 익히는 교본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