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於鄕黨(공자어향당)에 恂恂如也(순순여야)하사 似不能言者(사불능언자)러시다
其在宗廟朝廷(기재종묘조정)하사는 便便言(편편언)하사대 唯謹爾(유근이)러시다
공자께서 향리에 계실 때에는 온화하고 공손하시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셨다.
종묘와 조정에 계실 때에는 조리가 분명하게 말씀을 잘 하셨지만 다만 조심스럽게 하셨다.
朝(조)에 與下大夫言(여하대부언)에 侃侃如也(간간여야)하시며
與上大夫言(여상대부언)에 誾誾如也(은은여야)러시라
君在(군재)시어든 踧踖如也(축적여야)하시며 與與如也(여여여야)러시다
조정에서 하대부들과 말씀하실 때에는 강직한 듯했으며 상대부들과 말씀하실 때에는
화목하고 정직한 듯하셨다.
임금이 계실 때에는 공경하면서 조심하셨고 예절에 맞으셨다.
君(군)이 召使擯(소사빈)이어시든 色勃如也(색발여야)하시며 足躩如也(족곽여야)러시다
揖所與立(읍소여립)하시대
左右手(좌우수)러시니 衣前後 襜如也(의전후 첨여야)러시다
趨進(추진)에 翼如也(익여야)러시다 賓退(빈퇴)어든 必復命曰(필복명왈)
賓不顧矣(빈불고의)라 하더시라
임금이 (공자를) 불러 외국 손님을 접대하게 하시면 얼굴빛이 달라지시고 발걸음이 빨라지셨다.
함께 서 있는 손님에게 읍하실 때에는 왼쪽 사람에게는 손을 왼쪽으로 잡고,
오른쪽 사람에게는 손을 오른쪽으로 잡으니 옷의 앞뒤 자락이 가지런하였다.
빨리 걸어 나아가실 때에는 마치 새가 날개를 펴듯 단정하였다. 손님이 물러가면 반드시 복명하기를,
“손님은 돌아보지 않고 잘 떠나갔습니다.”라고 하셨다.
入公門(입공문)하실새 鞠躬如也(국궁여야)하사 如不容(여불용)이러시며
立不中門(입불중문)하시며 行不履閾(행불이역)이러시다
過位(과위)하실새 色勃如也(색발여야)하시며 足躩如也(족곽여야)하시며
其言(기언)이 似不足者(사부족자)러시다
攝齊升堂(섭재승당)하실새 鞠躬如也(국궁여야)하시며 屛氣(병기)하사 似不息者(사불식자)러시다
出降一等(축강일등)하사는 逞顔色(령안색)하사 怡怡如也(이이여야)하시며
沒階(몰계)하사는 趨進翼如也(추진익여야)하시며
復其位(복기위)하사는 踧踖如也(축적여야)러시다
대궐 문을 들어가실 때는 몸을 굽히시는 것이 마치 (문이 작아서) 용납지 못하시는 듯하셨다.
서 계실 때에는 문 가운데 서지 않았으며, 문을 드나들 때는 문턱을 밟지 않으셨다.
(임금이 계시던) 자리를 지나갈 때에는 얼굴빛이 달라지시고 발걸음이 빨라지시며
말씀은 부족한 듯이 하셨다.
옷자락을 잡고 당에 오르실 때에는 몸을 굽히시고 숨을 죽여 쉬지 않는 듯이 하셨다.
밖으로 나와 계단 하나를 내려서서 얼굴빛을 풀었는데 즐거운 듯하시며,
계단을 다 내려 오셔서 빨리 걸어가는 것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펴듯 단정하시며.
자리에 돌아와서는 공경하면서 조심하셨다.
執圭(집규)하사대 鞠躬如也(국궁여야)하사
如不勝(여불승)하시며 上如揖(상여읍)하시고
下如授(하여수)하시며 勃如戰色(발여전색)하시며
足蹜蹜如有循(족축축여유순)이러시다
享禮(향례)에 有容色(유용색)하시며 私覿(사적)에 愉愉如也(유유여야)러시다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홀(임금의 위임을 상징하는 사람 형상의 옥)을 잡고 계시면 몸을 굽히듯 하여
(무게를) 이기지 못하듯 하셨다. 그것을 올리시는 것은 읍하는 정도로 하시고
내리실 때는 물건을 내주실 때 정도로 하시는데 두려워하시는 것 같은 얼굴빛으로 변하시고,
발은 뒤꿈치로 옮겨가시는데 더듬어 가시는 듯하셨다.
예물을 바치는 자리에서는 온화한 얼굴빛을 했으며, 사적으로 접견하실 때에는 얼굴빛을 즐거운 듯하셨다.
君子(군자)는 不以紺緅(불이감추)로 飾(식)하시며
紅紫(홍자)로 不以爲褻服(불이위설복)이러시다
當暑(당서)하사 袗絺綌(진치격)을 必表而出之(필표이출지)러시다
緇衣(치의)엔 羔裘(고구)요 素衣(소의)엔 麑裘(예구)요
黃衣(황의)엔 狐裘(호구)러시다 褻裘(설구)는 長(장)하대 短右袂(단우예)러시다
必有寢衣(필유침의)하시니 長(장)이 一身有半(일신유반)이러라
狐貉之厚(호맥지후)로 以居(이거)러시다 去喪(거상)하사는 無所不佩 (무소불패) 러시다
非帷裳(비유상)이어든 必殺之(필쇄지)러시다
羔裘玄冠(고구현관)으로 不以弔(불이조)러시다 吉月(길월)에 必朝服而朝(필조복이조)러시다
군자(공자)는 감색과 아청색으로 상복의 가장자리를 두르지 않았으며,
홍색과 자색으로 평상복을 만들지 않았다.
더울 때에는 가는 갈포와 굵은 갈포로 만든 홑옷을 반드시 겉에 입었다.
검은 옷에는 염소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흰 옷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으며,
누런 옷에는 여우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었다.
평상시에 입는 갖옷은 길고 오른쪽 소매는 짧게 했다.
반드시 (잘 때는) 잠옷을 입었는데 길이가 몸길이의 한 배 반이었다.
여우와 담비의 두터운 털옷을 입고 지냈다. 상복을 벗고 난 후에는 무슨 패옥이나 다 찼다.
조회나 제사에 입는 것이 아니면 치마는 반드시 (폭에 주름을 잡지 않고) 줄여서 꿰매었다.
검은 염소 갖옷에 검정 갓으로는 조상을 가지 않았다. 초하룻날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조회에 나갔다.
齊必有明衣(재필유명의)러시니 布(포)러라
齊必變食(재필변식)하시며 居必遷坐(거필천좌)러시다
목욕재계할 때에는 반드시 목욕 옷이 있는데 베로 만든 것이며,
반드시 음식을 평상시와 달리 하고, 거처할 자리를 반드시 평상시와 달리 하셨다.
食不厭精(식불염정)하시며 膾不厭細(회불염세)러시다
食饐而餲(식의불애)와 魚餒而肉敗(어뇌이육패)를 不食(불식)하시며
色惡不食(색악불식)하시며 臭惡不食(취악불식)하시며 失飪不食(실임불식)하시며
不時不食(불시불식)이러시다
割不正(할부정)이어든 不食(불식)하시며 不得其醬(부득기장)이어든 不食(불식)이러시다
肉雖多(육수다)이나 不使勝食氣(불사승식기)하시며
唯酒無量(유주무량)하사대 不及亂(불급난)이러시다
沽酒市脯(고주시포)를 不食(불식)하시며 不撤薑食(불철강식)하시며 不多食(불다식)이러시다
祭於公(제어공)에 不宿肉(불숙육)하시며 祭肉(제육)은 不出三日(불출삼일)하더시니
出三日(출삼일)이면 不食之矣(불식지의)니라
食不語(식불어)하시고 寢不言(침불언)이러시다
雖疏食菜羹(수소식채갱)이라도 瓜必祭(과필제)하사대 必齊如也(필재여야)러시다
밥은 잘 찧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회는 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밥이 쉬어 변하거나 생선이 뭉그러지고 고기가 썩은 것은 먹지 않았으며,
색이 나쁘거나 냄새가 나쁜 것은 먹지 않았고, 조리가 잘못 됐거나
제 철의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고기를 썬 것이 반듯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간이 맞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고기가 비록 많아도 밥보다 더 많이 먹지는 않았으며,
오직 술은 제한이 없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
시장에서 사온 술이나 육포는 먹지 않았으며, 생강으로 만든 것은 계속 먹었으나 한꺼번에 많이 먹지는 않았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받은 고기는 밤을 넘기지 않았고, 집안 제사에 쓴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 않았고,
사흘을 넘기면 먹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잠자리에 들어서 말을 하지 않았다.
거친 밥과 나물, 국이라도 반드시 제사를 지냈으며 반드시 재계한 듯 경건하였다.
席不正(석부정)이어든 不坐(불좌)러시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鄕人飮酒(향인음주)에 杖者出(장자출)이어든 斯出矣(사출의)러시다
鄕人儺(향인나)에 朝服而立於阼階(조복이립어조계)러시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는 지팡이를 짚은 늙은이가 나가면 따라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굿을 지낼 때에는 조복을 입고 동쪽 계단에 서 있었다.
問人於他邦(문인어타방)하실새 再拜而送之(재배이송지)러시다
康子饋藥(강자궤약)이어늘 拜而受之曰(배이수지왈)
丘未達(구미달)이라 不敢嘗(불감상)이라하시다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에게 안부를 물을 때에는 가는 사람에게 두 번 절하고 보냈다.
강자(계강자)가 약을 내리자 절하고 약을 받으며 말씀하시기를,
“ 나는 이 약을 잘 모르므로 감히 맛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廐焚(구분)이어늘 子退朝曰(자퇴조왈)
傷人乎(상인호)아하시고 不問馬(불문마)하시다
마구간이 불에 탔는데 공자께서 조회를 마치고 물러나와 말씀하시기를,
“ 다친 사람은 없느냐 ?”라고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君(군)이 賜食(사식)이어든 必正席先嘗之(필정석선상지)하시고
君(군)이 賜腥(사성)이어시든 必熟而薦之(필숙이천지)하시고
君(군)이 賜生(사생)이어시든 必育之(필육지)러시다
侍食於君(대식어군)에 君祭(군제)어시든 先飯(선반)이러시다
疾(질)에 君(군)이 視之(시지)어시든 東首(동수)하시고 加朝服拖紳(가조복타신)이러시다
君(군)이 命召(소명)어시든 不俟駕行矣(불사가행의)러시다
임금이 음식을 주면 반드시 자리에 반듯하게 앉아서 먼저 맛을 보고,
임금이 날고기를 주면 반드시 익혀서 조상에게 올리고,
임금이 산 짐승을 주면 반드시 길렀다.
임금을 모시고 식사할 때 임금이 제사를 지내면 (임금을 위해 맛보아 주듯이) 먼저 밥을 먹었다.
병이 났을 때 임금이 와서 보면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조복을 덮고 띠를 걸쳐 놓았다.
임금이 명을 내려 부르면 수레가 준비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났다.
入太廟(입태묘)하사 每事(매사)를 問(문)이러시다
태묘에 들어가서는 모든 일을 물어서 하셨다.
朋友死(붕우사)하여 無所歸(무소귀)어든 曰 於我殯(왈 어아빈)이라하더시다
朋友之饋(붕우지궤)는 雖車馬(수마차)라도 非祭肉(비제육)이어든 不拜(불배)러시다
친구가 죽어 돌아갈 곳이 없으면 “내 집에 빈소를 마련하라.”고 하셨다.
친구가 보내온 선물은 비록 수레와 말일지라도 제사에 쓸 고기가 아니면 절하지 않았다.
寢不尸(침불시)하시며 居不容(거불용)이러시다
見齊衰者(견재쇠자)하시고 雖狎(수압)이나 必變(필변)하시며
見冕者與瞽者(견면자여고자)하시고 雖褻(수설)이나 必以貌(필이모)러시다
凶服者(흉복자)를 式之(식지)하시며 式負版者(식부판자)러시다
有盛饌(유성찬)이어든 必變色而作(필변색이작)이러시다
迅雷風烈(신뇌풍열)에 必變(필변)이러시다
잠잘 때는 (엎드려) 죽은 사람처럼 하지 않으며, 댁에 계실 때는 엄숙한 얼굴을 하지 않으셨다.
상복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비론 친근한 사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얼굴빛을 달리하시고,
면류관을 쓴 사람과 앞 못 보는 사람을 보면 비록 자주 만나는 처지라 할지라도 반드시 예(모)를 갖추었다.
상복을 입은 사람에게는 (상반신을 굽혀) 경례하고, 도판(지도와 호적)을 진 사람에게는 경례하였다.
풍성하게 차린 음식이 나오면 얼굴빛을 고치고 (경의를 표하여) 일어났다.
요란한 천둥소리와 세찬 바람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얼굴빛을 바꾸었다.
升車(승거)하사 必正立執綏(필정입집수)러시다
車中(거중)에 不內顧(불내고)하시며
不疾言(불질언)하시며 不親指(불친지)러시다
수레에 오르면 반드시 똑바로 서서 말고삐를 잡으셨다. 수레 안에서는 안을 둘러보지 않았고,
말을 빨리 하지도 않았으며, 손가락으로 직접 물건을 가리키지도 않으셨다.
色斯擧矣(색사거의)하여 翔而後集(상의후집)이니라
曰 山梁雌雉(왈 산양자치) 時哉時哉(시재시재)인저
子路共之(자로공지)한대 三嗅而作(삼후이작) 하시다
새도 사람의 얼굴 빛을 보고 몸을 움직여 공중을 날다 다시 내려와서 모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산골짜기 암꿩은 제때를 만났구나. 제때를 만났구나.”라고 하셨다.
이때 자로가 모이를 주니 꿩이 세 번 냄새를 맡고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