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1.  繼 善 篇 ( 계 선 편 )

백운산촌노 2009. 12. 21. 12:11

 

 

 

子曰(자왈)
      爲善者(위선자 )는 天報之以福(천보지이복 )하고
      爲不善者(위불선자 )는 天報之以禍( 천보지이화)이니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주시느니라."고 하셨다.
 
漢昭烈(한소열)이 將終(장종)에 勅後主曰(칙후주왈),
       勿以善小而不爲(물이소이불위)하고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하라.
한나라의 소열 황제가 죽을 때 후주에게 조칙을 내려서 말하기를,
         “ 비록 적은 선이라도 반드시 행하고,
           적은 악일 지라도 행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셨다.
 
莊子曰(장자왈)
       一日不念善(일일 불념선)이면 諸惡(제악)이 皆自起(개자기)니라.
장자가 말하기를,
         "하루라도 착한 일을 생각지 않으면, 모든 악한 것이 저절로 일어나느니라."고 하셨다.
 
太公(태공)이 曰(왈)
        見善如渴(견성여갈)하고 聞惡如聾(문악여롱)하라,
        又曰(우왈) 善事須貪(선사수탐)하고 惡事莫樂(악사막락)하라.
태공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본 듯이 주저하지 말며,
           악한 것을 듣거든 귀머거리 같이 하라"
           또한  "착한 일이란 탐내야 하며, 악한 일이란 즐겨 하지 말라.“ 고 하셨다.
 
馬援(마원)이 曰(왈)
         終身行善(종신행선)이라도 善猶不足(선유부족)이요
         一日行惡(일일행악)이라도 惡自有餘(악자유여)니라
 마원이 말하기를,
          "한평생 착한 일을 행하여도 착한 것은 오히려 부족하고,
           단 하루를 악한 일을 행하여도 악은 스스로 남음이 있느니라."고 하셨다. 
 
司馬溫公(사마온공)이 曰(왈)
         積金以遺子孫(적금이유자선)이라도 未必子孫(미필자손)이 能盡守(능진수)요
         積書以遺子孫(적서이유자손)이라도 未必子孫(미필자손)이 能盡讀(능진독)이니,
         不如(불여) 積陰德於冥冥之中 (적음덕어명명지중)하야 
         以爲子孫之計也(이위자손지계야)니라.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돈을 모아 자손에게 넘겨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킨다고 볼 수 없으며,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겨 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읽는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책이나 돈을 물려주는 것은 남모르는 가운데 덕을 쌓아서 자손을 위한
           계교로 삼는 것보다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景行錄(경행록)에 曰(왈)
        恩義(은의)를 廣施(광시)하라
        人生何處不相逢(인생하처불상봉)이니 讐怨(수원)을 莫結(막결)하라
        路逢狹處(노봉협처)면 難回避(난회피)니라.
 ”경행록”에 말하기를,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라.
          인생이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없으니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좁은 길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려우니라."고 하셨다.
 
莊子曰(장자왈)
         於我善者(어아선자)도 我亦善之(아역선지)하고
         於我惡者(어아악자)도 我亦善之(아역선지) 하라
         我旣於人(아기어인)에 無惡(무악)이면
         人能於我(인능어아)에 無惡哉(무악재)인저
장자가 말하기를,
          “ 나에게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도 내, 또한 착하게 하고,
            나에게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도 내, 또한 착하게 하라.
            내가 이미 남에게 악하게 아니하였으면
            남도 나에게 악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東岳聖帝(동악성제) 垂訓 曰(수훈 왈)
         一日行善(일일행선)이라도 福雖未至(복수미지)나 禍自遠矣(화자원의)요
         一日行惡(일일행악)이라도 禍雖未至(화수미지)나 福自遠矣(복자원의)라
         行善之人(행선지인)은 如春園之草(여춘원지초)하여 不見其長(불견기장)이라도
         日有所增(일유소증)하고
         行惡之人(행악지인)은  如磨刀之石(여마도지석)하여  不見其損(불견기소)이라도
         日有所虧(일유소휴)니라.
 동악성제” 가 훈계를 내려 말하기를,
          " 단 하루 착한 일을 행할지라도,  복은 비록 이르지 아니하나 화는 스스로 멀어진다.
            단 하루 악한 일을 행할지라도,  화는 비록 이르지 아니하나 복은 스스로 멀어진다.
            착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봄 동산에 풀과 같아서 그 자라나는 것이 보이지 않으나
            날로 더하는 바가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갈리어서  닳아 없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날로 이지러지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子曰(자왈)
         見善如不及(견선여불급)하고
         見不善如探湯(견불선여탐탕)하라.
 공자가 말하기를,
          "착한 것을 보거든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고,
           악한 것을 보거든 끓는 물을 만지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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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孔子)
     : 공자는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鄒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에서   BC 551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춘추 말기 사람으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인(仁)이며,‘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다)'를
         그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인(仁)을 단지 도덕규범이 아닌 사회질서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 생각했다.
 
漢昭烈
     :  촉한의 소열제인 유비 현덕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재위 221∼223). 관우 ·장비와 결의형제하였으며, 삼고지례로 제갈량을 맞아들였다.
         220년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莊子
     :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太公
   : 본명 강상(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馬援
   : 자 문연(文淵). 산시성[陝西省] 싱핑현[興平縣] 북동지방의 유푸펑[右扶風] 마오링[茂陵] 출생. 전한(前漢) 이래
      명문(名門) 출신으로, 처음에는  북방으로 피하여 목축에 종사하였고, 그 후 빈객(賓客) 수백가(數百家)를
      포섭하여 세력을 얻었다.  왕망(王莽)의 부름을 받고 한중랑태수(漢中郞太守)가 되었고, 이어서 외효(隗浴) 밑에서
      벼슬하다가, 다시 광무제(光武帝)의 신하로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이어서 농서태수(짱西太守)가 되어
      간쑤성[甘肅省] 방면의 강(羌) ·저(免) 등의 외민족을 토벌하였다.
 
司馬溫(司馬光)
     : 자 군실(君實). 호 우부(迂夫)·우수(迂叟). 시호 문정(文正). 산시성[山西省:夏縣 涑水鄕] 출생이다.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1067년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어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신법(新法:革新政策)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編年體)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洛陽]에 거주하며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 《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이 되자, 신법을 싫어하는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에 복귀, 정권을 담당하였다.
 
 景行錄(경행록)
   : 景行錄(경행록) 은 송나라 때의 저작으로 '착한 행실을 기록한 책'이라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물론 저자도 알려지지 않은 저자 미상의 책.
 
 東岳聖帝 :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음( 훌륭한 황제로 인식)